"경기가 어렵다". 하루 이틀 듣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스위스 워치메이커들에게 2025년은 유독 이 표현이 크게 와닿는 한 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정학적 리스크와 금융시장의 변동으로 시계 수요는 위축되는 반면 안전자산 선호도가 높아지며 금과 스위스 프랑의 가치가 높아진 2025년은 말 그대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경제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점은 신품 시계 시장과 달리 중고 시계 시장은 가격과 수요가 동반 상승하는 매우 견조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2025년의 중고 시계 시장 데이터를 검토하며 왜 우리가 이 시점에 더더욱 중고 시계 시장에 주목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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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가 위축되면 제조업체들이 가격을 인하하거나 가격 인상률을 낮추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고 어쩌면 당연한 경영 전략입니다. 하지만 기능적 가치가 아닌 무형의 가치로 특별함을 어필해야 하는 스위스 워치메이커들에게 가격 인하는 오히려 브랜드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는 위험이 높습니다. 이는 과거 쿼츠 파동 당시, 가격 접근성을 높이는 전략을 택했던 브랜드들이 오늘날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는 이유와도 같은 맥락입니다.

자료 출처 : Federation of Swiss Watch Industry
그렇다면 낮아지는 수요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답은 가격을 높이는 것입니다. 기존 상품의 가격을 인상하는 것은 물론, 더욱 특별한 컴플리케이션과 보석 세팅, 특수한 소재 등으로 차별화를 강조한 제품을 대거 출시하거나 더욱 높은 가격대의 새로 라인을 선보이는 방식으로 평균 단가를 끌어올립니다. 롤렉스의 랜드-드웰러 출시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자료 출처 : 롤렉스 공식 홈페이지

자료 출처 : 오메가 공식 홈페이지

자료 출처 : 까르띠에 공식 홈페이지, VIVER Index
하지만 소득 증가와 동반되지 않는 시계 가격의 인상은 가격 접근성을 낮추고 잠재 수요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자료 출처: St.Louis Fed, BLS, 롤렉스 공식 홈페이지
흥미로운 점은, 신품 시장이 정체된 2025년에 중고 시계 시장은 전년 대비 39%나 성장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은 단순히 가격 상승(평균 거래 가격, 전년 대비 7% 상승)으로만 견인된 것이 아니라, 거래량 또한 동반 성장(전년 대비 29% 증가)한 결과라는 점이 유의미합니다.

자료 출처: EveryWatch
또한 중고 시장에서는 신품 시장과 같은 강자 독식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점유율 기준으로는 신품 시장과 마찬가지로 소수의 브랜드가 과반수를 차지하지만, 성장률에 있어서는 신품 시장에서 비교적 점유율이 낮은 브랜드의 중고 거래 성장도 돋보였습니다.

자료 출처: EveryWatch
근래 홍보 부진이나 신제품의 흥행 실패 등으로 브랜드 가치가 약화되었지만, 긴 역사와 높은 제조 기술을 보유한 메이커들의 시계를 상당한 감가상각이 반영된 이후의 가격으로 매입할 수 있다는 점이 중고 시계 시장의 큰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 종로구 '세운스퀘어' ⓒ한국일보
그렇다면 국내 중고 시계 시장은 어떨까요? 글로벌 중고 시장과 같은 이유로 국내 중고 시장 역시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다만, 국내 시장만의 구조적 변화가 앞으로 중고 시계 가격을 더욱 끌어올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첫 번째는 가속화되는 원화 약세와 K-컬처 흥행에 따른 외국인 방문자의 증가입니다. 환율이 높아지면(원화가 약세가 되면) 외국인 입장에서 국내 시계를 비교적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립니다. 마치 우리가 일본 시계 시장을 저렴하다고 인식하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동시에 국내 딜러들 입장에서는 더욱 높은 가격으로 해외 시장에 수출할 수 있게 되므로, 상대적으로 낮은 원화 표기 가격으로 국내 시장에서만 영업할 유인이 줄어듭니다. 게다가 한국 대중문화의 흥행으로 외국인 관광객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에서 시계 구매를 희망하는 외국인 방문자의 증가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료 출처: Investing.com
두 번째 요소는 안전한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중고 시계 시장의 인프라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중고 시계 시장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언제나 거래 신뢰성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VIVER와 같은 중고 시계 거래 플랫폼의 성장은 거래에 대한 불안을 덜어주고, 궁극적으로 중고 시계 구매 수요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VIVER 쇼룸 (잠실 롯데호텔 월드점)
결국 환율의 영향으로 국내 공급이 줄어들고, 거래 안정성의 개선으로 수요가 늘어나는 구조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한때 중고 시계는 새 시계를 구매하기 어려운 분들을 위한 대안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가품 유통 등 불안전한 거래 관행이 이어지며 시장 참여자와 시계 자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국내 중고 시계 시장의 더 높은 성장을 앞두고, 이러한 제약 요소들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개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이는 중고 시계 가격을 꾸준히 지지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David Hwang
시계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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