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케이스의 소재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케이스 소재로서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금속은 쉽게 헤아릴 수 있습니다. 빛나는 광택과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플래티넘이나 골드 같은 귀금속 소재. 이들은 최고의 시계를 만들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강인하지만 가볍고 피부를 자극하지 않는 티타늄. 내부식성이 높고 표면 변화가 거의 없으며 좋은 광택을 얻을 수 있는 무난한 스테인리스 스틸도 시계 케이스를 만들 때 없어서는 안되는 소재입니다.

Tantalus Gioacchino Assereto circa 1640s
1802년 스웨덴 화학자 안데르스 구스타프 에케베리가 발견한 어떤 금속이 있습니다. 원소기호 Ta, 원자번호 73이며 산에 거의 녹지 않는 최강의 내부식성 때문에 그리스 신화의 탄탈로스(Tantalos)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탄탈로스는 제우스의 아들로 신들의 음식을 훔쳐다 인간에게 주고 신들의 비밀을 누설한 죄로 영원히 배고프고 목마른 형벌을 받았습니다. 물과 과일이 코앞에 있지만 절대 닿을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되죠. 에케베리가 발견한 금속을 강산에 담가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고 "산이 아무리 덤벼도 녹이지 못하는 모습이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탄탈로스와 같다"고 해서 제우스 아들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이 금속의 이름은 '탄탈럼(Tantalu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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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부터 쎈 이 금속은 시계 케이스 소재로 가끔씩 등장합니다. 스테인리스 스틸처럼 보편적으로 좋은 물성을 가진 것도 아니고, 아니 시계 케이스로는 오히려 부적합한 조건이 더 많다고 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탄탈럼은 스테인리스 스틸에 비해 약 2배, 경량 소재로 꼽히는 티타늄에 비해 약 3.75배나 무겁습니다. 골드에 비해서는 약 6% 가량 무겁다고 하니 시계 케이스 정도의 부피 단위라면 골드와 큰 차이가 없을 듯합니다. 플래티넘은 시계에서 최상위 소재로 인정받는 만큼 탄탈럼 이상의 무게감을 자랑합니다. 탄탈럼 대비 약 20% 이상 무겁습니다.

케이스 소재별 무게 순위 © VIVER
선호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계는 손목에 착용하는 아이템이기 때문에 가벼울수록 착용감은 좋아집니다. 탄탈럼은 골드와 비슷한 무게이기 때문에 시계를 무겁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골드나 플래티넘처럼 귀금속도 아니고 저렴한(같은 무게로 비교 시 골드 시세의 대략 1/360 수준) 금속입니다. 그래서 굳이 그 무게까지 감당하면서 탄탈럼 시계를 차야 하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스테인리스 스틸과 골드의 투톤 케이스가 대표적인 예로, 상이한 컬러의 금속 소재를 매칭하는 것은 대비 효과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시계 케이스의 소재는 무브먼트를 보호하는 최우선의 목적 외에도 컬러, 질감을 통해 개성을 발휘하는 역할도 있습니다. 어두운 청회색의 탄탈럼은 개성적인 편에 속하는 티타늄의 컬러보다도 훨씬 더 개성적입니다. 로우(Raw) 메탈의 원초적인 금속 질감이 들기도 하고, 언뜻 티타늄 같지만 더 깊고 차가운 톤을 드러냅니다. 폴리시드 가공을 하면 차가운 메탈릭 광택을 내며, 여느 금속에서 보기 어려운 시크한 감성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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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탈럼의 모스 경도는 6.5, 스테인리스 스틸과 티타늄에 비해 높습니다. 비커스 경도로는 티타늄에 비해 약간 낮은 수준으로 누르는 힘에 대해서는 티타늄이 조금 더 우수합니다. 하지만 탄탈로스라는 이름처럼 강력한 산 내부식성을 가졌고, 거의 3,000도에 달하는 용융점도 가졌습니다. 이 때문에 가공 시에는 과도한 열을 발생시킵니다. 공구에 열이 전해져 급속도로 마모되고, 높은 연성으로 인해 금속이 점토처럼 늘어지며 절삭 시에 얇게 깎기가 힘듭니다. 가공이 어렵기로 소문난 플래티넘에 비해서도 탄탈럼 가공이 3배 이상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난이도가 엄청나게 높습니다. 때문에 시계 제조사의 관점에서는 분명 악마의 금속이라는 말이 나올 법합니다.

Ref. 25829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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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탄탈럼 시계는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로 알려져 있습니다. 필립스 등 여러 경매회사의 기록에 따르면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특별 주문품으로 시작됩니다. 사냥 중 시계의 반사 빛이 사냥감을 놀라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광 다크톤의 케이스가 필요했습니다. 처음에는 왕의 총기 장인이 사냥총 총열의 블루잉 기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오데마 피게가 탄탈럼 고유의 억제된 광택으로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Ref.56175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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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탈럼을 사용한 시계의 리퍼런스 넘버에는 숫자 뒤에 TT(탄탈럼+스틸)나 TR(탄탈럼+로즈 골드)이 붙었습니다. (드물게 탄탈럼과 플래티넘 조합인 TP도 있습니다) 요즘 TT나 TR은 보기 어려워진 코드로 현재는 탄탈럼 시계를 만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탄탈럼을 사용한 모델들은 특유의 컬러와 무게감을 가졌습니다. 골드 케이스에 필적하는 묵직함이 있죠. 탄탈럼을 사용해 여러 버전의 로열 오크가 만들어졌는데, 그중 로즈 골드와 투톤 모델은 탄탈럼의 컬러가 더욱 도드라졌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청회색 탄탈럼의 표면을 헤어라인의 무광으로 가공하고, 골드 베젤과 브레이슬릿 연결 링크로 뚜렷한 대비를 얻어냈습니다. 요즘 어두운 컬러를 내기 위해 세라믹, 카본 등의 여러 소재가 사용되고 있지만, 금속성의 질감과 차가움을 드러내는 탄탈럼은 분명 다른 멋이 있습니다. 덕분에 경매시장에서 빈티지 탄탈럼 시계는 상당히 높은 가격에 낙찰되고 있습니다.

Ref. 14790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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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2296.80 더 비스트(The B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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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소수의 레퍼런스 지만 오메가는 꾸준하게 탄탈럼 시계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1992년 처음으로 탄탈럼을 사용한 씨마스터 다이버 300M 크로노그래프(Ref. 2296.80)를 선보였습니다. ‘더 비스트(The Beast)’라는 별칭으로 불리는데, 로즈 골드, 티타늄, 탄탈럼으로 구성된 트라이 메탈의 강인하면서 화려한 외관과 이에 못지않은 비싼 가격으로 발매되었습니다. 여기에 탄탈럼은 브레이슬릿 링크를 구성하는 소재의 하나로 사용되어, 비교적 제한된 사용이 이뤄졌지만 제작 난이도는 상당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2~3년가량 생산된 이후 단종되었고, 비싼 가격으로 인기가 없던 점이 단종의 주된 이유였습니다.

Ref. 2296.80 탄탈럼 브레이슬릿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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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18년 바젤월드에서 씨마스터 다이버 300M 출시 25주년을 기념해 데이트 버전으로 ‘더 비스트’를 다시 소환했습니다. 새로운 세대로 탄생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특유의 소재 구성과 배분은 더 비스트와 동일했습니다. 그리고 2020년 더 비스트 계보를 완전히 계승한 크로노그래프 버전이 발매됩니다. 인하우스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9900을 탑재했고, 로즈 골드를 오메가의 독자적인 세드나 골드로 대체하면서 트라이 메탈과 탄탈럼의 매력이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The new Omega Seamaster Diver 300M Chronograph
Titanium, Tantalum and Gold
(Ref. 210.60.44.51.0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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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탄탈럼 워치는 몇몇 시계회사들을 통해 시도되었습니다. 그중 하이엔드 브랜드 프랑수아 폴 쥬른(P.Journe)이 많은 모델을 탄탈럼 케이스로 만든 바 있습니다. 주로 유광의 폴리시드 가공을 해 오데마 피게나 오메가의 탄탈럼에서 볼 수 없는 깊고 어두운 광택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가공이 어렵지만 완성하면 여느 금속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악마적 매력을 지닌 금속. 바로 탄탈럼입니다.

P.Journe Tourbillon Souverain Bleu Caliber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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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x
Writer
시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