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연금술
소재로 말하는 브랜드 스토리
Beginner

금이라도 다 같은 금이 아닙니다. 스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스틸은 아니고, 티타늄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자들 중에는 “아니, 원래 금은 다 다르잖아?”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다른 건 분명 맞습니다. 화이트 골드, 옐로 골드, 레드 골드로 색이 다르긴 하니까요. 하지만 색이 다를 뿐, 금을 구성하는 기본 물질은 같습니다. 여기서 "금이라도 다 같은 금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쪽은 바로 시계 회사들입니다. 실제로 기존의 금과는 다른 물질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인데요. 지금부터 시계 브랜드들이 펼치는 21세기 연금술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 보시죠.

헷갈리는 고유 명칭

시계의 이름이나 스펙 시트를 보다 보면, Sedna™ Gold(오메가)나 Ceratanium®(IWC) 같은 표시를 볼 수 있습니다. 작은 글씨의 ™은 등록상표를 의미하고, 원으로 둘러싼 ®은 공식 등록상표를 말합니다.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없고의 차이는 있지만, 두 표시가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내용은 '고유성'입니다. 즉 “이것은 나만의 것이므로 다른 시계 회사에는 같은 것이 없다”라고 말하거나 주장하는 셈이죠.

시계 회사가 이러한 주장은 브랜드 차별화 전략의 일환입니다. ‘나만이 가진 개성’을 더욱 강조해 매출을 올리고 싶은 마음인 건데요. 기계식 시계는 태엽과 톱니바퀴를 사용해 작동한다는 제약 조건 때문에, 한 단계 더 나아간 쿼츠 같은 혁신적인 기술을 쓸 수 없죠. 새로운 기능을 계속해서 만들고 있지만 특수한 성격 때문에 패러다임을 바꿀 기능이나 기술을 쓸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소재가 ‘새로움’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으로 주목받게 된 것이죠. 그렇다 보니 기능은 물론, 소재에까지 고유성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전통의 금을 대신하다

옐로우, 화이트, 핑크 프로스티드 골드의 로열 오크 미니<br/>© Audemars Piguet

옐로우, 화이트, 핑크 프로스티드 골드의 로열 오크 미니
© Audemars Piguet

악세서리를 럭셔리로 격상시킬 수 있는 요소는 뭐니뭐니 해도 금입니다. 전통적으로 하이엔드 워치메이커들은 골드 케이스를 택했습니다. 이들 시계의 케이스백에 각인된 숫자 ‘750’은 18k 골드로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18k 골드를 사용하는 이유는 단단함과 가공성이 케이스 제작에 적합하기 때문인데요. 금 75%에, 나머지 25%는 은과 동 등의 소재를 넣어 금 합금을 만듭니다. 이때 25%의 성분에 따라 금의 색깔이 결정되어, 화이트, 옐로, 레드 골드로 나뉩니다.

이렇게 만든 골드 케이스가 영원히 유지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빛이 바랜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변색이 나타나기도 하죠. 로즈·레드 골드 계열에서 이런 현상이 특히 두드러집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계 회사들은 찬란한 골드의 빛깔을 오래 유지할 수 없을까 고민했고, 그 결과 현대적 연금술로 새로운 형태의 금을 개발하게 됩니다.

에버로즈 골드

선두주자로는 마케팅의 귀재 롤렉스를 꼽을 수 있습니다. 예전부터 골드와 스틸의 콤비에 롤레조(Rolesor)같은 이름 붙이기를 좋아했던 롤렉스는루 새로운 독자개발 합금 레드 골드에 에버로즈(Everos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2016년 출시 후 줄곧 인기를 끌고 있는 60주년 데이-데이트<br/>Ref. 228235 / © Watch Club

2016년 출시 후 줄곧 인기를 끌고 있는 60주년 데이-데이트
Ref. 228235 / © Watch Club

시간이 흐르면서 레드 골드의 색이 점점 바래지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관계로, 롤렉스는 더 오래 유지되는 로즈 골드(레드 골드 계열 중 덜 붉은 색) 컬러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에버로즈’를 선정했습니다.

타이거 아이언 다이얼의 GMT-마스터 II '루트비어'<br/>© A Blog to Watch

타이거 아이언 다이얼의 GMT-마스터 II '루트비어'
© A Blog to Watch

롤렉스는 에버로즈 골드를 만들 때, 부식과 화학물질에 강한 플래티넘을 첨가하는 독자적인 배합 방식을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연금술의 상세한 레시피에 대해서는 비밀로 부쳐졌으며 특허를 취득해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죠. 금을 직접 제련해서 사용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에버로즈 골드가 처음 등장했을 때, 기분 탓인지 기억 탓인지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더 붉어서 마치 구리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오메가의 문샤인™ 골드 & 세드나™ 골드

솔직히 말해, 오메가의 행보는 롤렉스를 벤치마킹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독자 합금 소재 개발에서도 그 영향을 엿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세드나™ 골드와 문샤인™ 골드입니다.

문샤인 골드™ 스피드마스터의 두가지 버전  / © Hodinkee

문샤인 골드™ 스피드마스터의 두가지 버전 / © Hodinkee

이름이 제법 멋지죠. '세드나'라는 이름은 자사의 컨스텔레이션 컬렉션에서 착안해, 태양계 외연 천체 중 하나인 세드나 별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화성처럼 붉은색을 띠는 별이라고 하는데요. 새로운 골드를 창조하기 위해 오메가는 팔라듐을 일부 사용했다고 알려졌지만, 역시 자세한 배합은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알려진 소재는 옐로 골드, 구리, 팔라듐). 특수 냉각 가공을 거쳐 완성한 세드나 골드는 전통적인 골드 소재에 비해 더 단단하고, 고유한 컬러를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Speedmaster Moonwatch Professional 310.60.42.50.10.001

Speedmaster Moonwatch Professional 310.60.42.50.10.001

42mm,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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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edmaster Moonwatch Professional 310.60.42.50.99.002

Speedmaster Moonwatch Professional 310.60.42.50.99.002

42mm, 옐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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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골드 계열의 카노푸스™ 골드(Canopus™ Gold)도 있습니다.

© Monochrome

© Monochrome

다른 브랜드는?

주로 그랑 컴플리케이션 시계에 사용되는 아머골드®<br/>© IWC Schaffhausen

주로 그랑 컴플리케이션 시계에 사용되는 아머골드®
© IWC Schaffhausen

IWC의 아머골드®(Armor Gold®)는 이름처럼 단단한 골드입니다. 전통적인 레드 골드의 컬러를 띠지만, 고유한 레시피와 특허받은 가공 방식을 이용해 구조가 개선되어 기존의 5N 골드에 비해 훨씬 더 뛰어난 경도와 내마모성을 자랑합니다(출처: IWC).

빅 뱅 인티그레이티드 킹 골드<br/>© Time+Tide

빅 뱅 인티그레이티드 킹 골드
© Time+Tide

위블로의 킹 골드(King Gold)는 아머골드와 유사한 관점에서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좀 더 과감한 부재료를 썼습니다. 18k 골드를 구성하는 25%의 부재료로 세라믹을 택했습니다. 다공질 세라믹에 금을 부어서 강력한 금을 만들어 낸 것이죠. 이 때문에 '금이냐 아니냐'라는 논쟁도 있었지만, 스위스 귀금속관리국(Bureau Central du Contrôle des Métaux Précieux)을 통해 금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골드테크™ 케이스를 채택한 섭머저블 PAM01070<br/>© Swisswatches Magazine

골드테크™ 케이스를 채택한 섭머저블 PAM01070
© Swisswatches Magazine

외에 파네라이의 골드테크™(Goldtech™) 같은 새로운 골드도 예시로 들 수 있습니다. 붉은 색조가 더 강한 골드테크™ 또한 일반 레드 골드의 약점인 색과 빛바램, 그리고 무른 물성을 개선하고 있습니다.

그 외의 소재

여기서 소개할 내용은 여러 소재를 퓨전하거나 전혀 새로운 소재를 만들어 낸 결과물입니다. IWC의 세라타늄®(Ceratanium®)은 세라믹과 티타늄의 퓨전을 통해 등장했습니다. 금속 소재의 기계적 특성과, 세라믹 소재의 표면 특성을 가지는 점이 특징인데요. 만화 『드래곤볼 Z』의 손오공과 베지터의 퓨전 같은 강력함을 지닙니다. 티타늄의 가벼우면서도 강한 내구성, 세라믹의 높은 표면 경도와 내마모성을 동시에 갖춘 이상적인 소재입니다.

세라타늄® 케이스의 파일럿 워치 크로노그래프 41 탑건,<br/>퍼포먼스 크로노그래프 41 / © Monochrome

세라타늄® 케이스의 파일럿 워치 크로노그래프 41 탑건,
퍼포먼스 크로노그래프 41 / © Monochrome

세라타늄®은 뛰어난 내구력과 긁힘 저항성 덕분에 스포츠 테마의 모델에 특화되었습니다. 현재까지는 오직 파일럿 워치와 아쿠아타이머 라인에만 적용되며, 실험적인 퍼포먼스 워치에도 중점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빅 파일럿 워치 쇼크 업소버 XPL 투르비옹 스켈레톤<br/>
© IWC Schaffhausen

빅 파일럿 워치 쇼크 업소버 XPL 투르비옹 스켈레톤
© IWC Schaffhausen

다음은 애호가들에게도 생소할 수 있는 벌크 금속 유리(Bulk Metallic Glass, 이하 BMG)입니다. BMG는 유리처럼 비정질적이면서도 금속의 단단함과 내구성을 갖춘 특수 합금입니다.

섭머저블 BMG-Tech PAM00692 / © Time+Tide

섭머저블 BMG-Tech PAM00692 / © Time+Tide

파네라이의 섭머저블(Submersible)에서 선보인 BMG‑Tech™가 벌크 금속 유리를 시계 케이스에 적용한 최초의 상용 사례로 꼽힙니다. 기존 티타늄보다 가볍고, 스크래치나 충격에 강하며, 부식에도 탁월한 저항성을 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고난도 가공이 요구되기 때문일까요, 일부 모델에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열 오크

로열 오크 "점보" 16202XT / © Hodinkee

2023년 출시된 로열 오크 '점보' 엑스트라 씬 16202XT는 티타늄과 BMG를 조합한 독특한 케이스 구조를 보여줍니다. BMG가 적용된 부분은 베젤, 케이스백, 그리고 브레이슬릿 스터드입니다 (브레이슬릿 전체가 아닌 스터드만 해당). 표면은 일반적인 티타늄보다 미묘한 광택을 띠며, 유리처럼 매끈하면서도 메탈 특유의 단단함이 느껴지는 질감을 자랑합니다.

Felix

Writer

시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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