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장성원 명장은 부산 남포동 일대의 중고 시계줄 가공소에서 보조업무를 시작하며 시계와의 인연을 맺었다. 처음 맡은 일은 중고 시계줄을 정리하고 가공하는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고객들의 시계를 가까이 접하면서 그는 점차 본체의 구조와 작동 원리에 호기심을 가지게 됐다. 그 궁금증은 곧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는 고장 난 시계를 직접 분해하고 조립하며 기계식 시계 특유의 정밀함과 논리적인 설계 구조에 매료되었고, 독학으로 수리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별다른 사사 없이 오로지 현장에서 축적한 경험을 기반으로 한 그의 수리 기술은 빠르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단골 고객이 늘어나며 본격적인 시계 수리 장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장 명장은 단순한 부품 교체나 외형 수리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내부 부품의 마모 패턴, 기어 간극, 오일 잔량 등을 정밀하게 분석해 고장 원인을 근본적으로 진단하는 능력을 갖췄다. 정밀 공학에 가까운 이 감각은 단순 기술자가 아닌 ‘기술자 이상의 기술자’라는 평가를 받게 만든 결정적 요소였다. 특히 스위스 장인들조차 수리를 포기한 빈티지 모델을 복원해낸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며, 장성원 명장의 업계 내 입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그는 실전 경험 속에서 고유의 수리 기법은 물론, 국내에 없던 특수 공구까지 직접 제작했다. 핸즈 탈착기, 다이얼 리프터, 전용 브러시 등은 모두 시계의 손상을 최소화하면서도 정밀도를 높이기 위한 고안이었다. 이러한 기법은 지금도 업계에서 ‘장성원식 공정’으로 불리며 후배 기술자들 사이에서 교본처럼 회자된다.
1997년, 그는 마침내 대한민국 최초로 시계 부문 명장 칭호를 받으며 그간의 기술과 헌신을 국가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단순한 수공 기술이 아닌, 시계 수리에 대한 해석력과 복원 철학이 제도권 내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된 첫 사례였다. 이후에도 그는 변함없이 실전 현장에서 수리와 감정을 이어가며, 오프라인 매장 ‘장성원시계’를 통해 일반 고객부터 고급 수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계와 사람을 마주하고 있다.
장 명장은 지금도 “수리에 지존은 없다”는 철학을 고수하며 매일같이 새로운 시계를 공부한다. 그의 50년은 단지 오래된 시간의 누적이 아닌, 정교한 기술을 한 점의 오차 없이 완성시켜온 장인의 헤리티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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