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렉스의 신규 컬렉션, 랜드-드웰러(Land-Dweller). 첫 인상은 디자인이 약간 변형된 데이트저스트 정도로 보였지만, 알아갈수록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를 직접적으로 겨냥했으며, 롤렉스가 하이엔드 워치메이킹에 더욱 집중하겠다는 선언적 의미를 담은 컬렉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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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드웰러는 기능적으로 데이트저스트와 동일합니다(시, 분, 초, 날짜). 사이즈는 36mm와 40mm로 출시되었으며, 소재는 오이스터스틸 케이스에 화이트 골드 베젤(데이트저스트와 동일) 외에 에버로즈 골드와 플래티넘 모델도 함께 선보였습니다. 또한, 두 귀금속 모델에는 다이아몬드 세팅 베젤 옵션도 제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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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롤렉스 제품들은 모두 거의 동일한 오이스터 케이스 디자인을 갖추고 있는 반면(1908 제외) 랜드-드웰러의 케이스는 일체형 브레이슬릿(Integrated Bracelet) 디자인을 택한 새로운 형태의 오이스터 케이스 입니다...
하지만’새롭다’라고 하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조금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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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렉스는 랜드-드웰러의 케이스 디자인이 과거 오이스터쿼츠(Oysterquartz)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오이스터쿼츠는 롤렉스가 쿼츠파동 시절 출시한 쿼츠 무브먼트 기반 데이트저스트와 데이-데이트으로 구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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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이스터쿼츠의 디자인 또한 1972년 출시된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케이스와 일체화된 납작한 브레이슬릿 디자인은 로열 오크, 오이스터쿼츠, 그리고 랜드-드웰러 모두에 공통되는 디자인 요소입니다. 물론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오직 1,000개만 생산 된 롤렉스 쿼츠 ref. 5100 “텍산(Texan/Texano)”라는 모델, 그리고 1975년 오이스터쿼츠 공식 출시 전 ref. 1530/1630이 있지만, 랜드-드웰러의 디자인은 오이스터쿼츠에 더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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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드웰러의 가격은 그 폭이 너무 넓어 ‘대략 얼마’라고 이야기를 하기가 매우 여렵습니다. 최저가 약 2,000만 원(36mm, 스틸)부터 1억 7,000만 원(40mm, 플래티넘, 다이아몬드 베젤)이 넘는 가격대까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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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드웰러의 가격을 유사 스펙의 로열 오크와 비교해 본다면, 스틸 버젼의 경우 로열 오크의 약 50% 대로 갭(gap)이 좀 있으나 다이아몬드 베젤을 탑재한 에버로즈 골드 랜드-드웰러는 동일한 기준의 로열 오크보다도 높은 가격에 판매됩니다.
로열 오크와 같은 하이엔드 타임피스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얇은 케이스 두께입니다. 얇은 두께는 손목에 ‘착 감기는’ 편안한 착용감을 제공하며, 더욱 완성도 높은 룩을 연출할 수 있어 파텍 필립, 피아제, 오데마 피게 같은 워치메이커들이 고난도의 연구 개발을 통해 이를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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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맥락에서 랜드-드웰러의 케이스 두께 또한 기존 롤렉스 제품보다 하이엔드 워치메이커들과 비교 가능한 수준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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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다’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랜드-드웰러와 주요 하이엔드 스포츠 워치들의 케이스 직경 대비 두께의 비율을 비교해 보았습니다(사람의 허리둘레 대비 신장처럼 말이죠). 데이트저스트 41mm의 경우, 케이스 두께는 12.5mm로 직경 대비 비율이 29%인 반면, 40mm 랜드-드웰러는 24%로, 쇼파드 알파인 이글이나 로열 오크처럼 ‘매끈한’ 프로필을 자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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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두께는 랜드-드웰러에 장착된 새로운 7135 무브먼트 덕분이며 그 기술적 진보는 포르쉐가 공냉식 엔진에서 수냉식 엔진으로 바꾼 것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2025 롤렉스 신작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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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버 7135는 마이크로 로터가 아닌 센트럴 로터를 사용하면서도, 4.7mm라는 놀라운 두께를 자랑합니다. 이는 유사한 구조의 오데마 피게 칼리버 4302(4.9mm)보다도 얇으며, 데이트저스트에 사용되는 칼리버 3235보다 약 20% 더 얇은 두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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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교한 무브먼트, 특히 18K 옐로 골드 로터의 움직임은 투명한 케이스백을 통해 감상할 수 있습니다. 첼리니 프린스 이후 20년 동안 투명 케이스백을 선보이지 않던 롤렉스는 2023년부터 하이엔드 타임피스(신규 1908 컬렉션, 데이토나 르망)에 이를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랜드-드웰러에는 전 모델에 적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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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진정한 '프리미엄화' 전략이지 않나 싶네요.
롤렉스 랜드-드웰러는 브랜드 인지도와 환금성을 갖추면서도 상대적으로 접근 가능한 가격대를 제시해, 하이엔드 세그먼트의 빈틈을 메우는 전략적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롤렉스가 GMT와 데이토나에서 보여준 것처럼, 랜드-드웰러 컬렉션에도 다양한 소재의 다이얼과 골드-스틸 투톤 모델 등이 추가되며, 가격대가 더욱 촘촘히 구성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2000년대 초 럭셔리 세단 시장에서 메르세데스 S-클래스와 벤틀리 아르나지/롤스로이스 팬텀 사이의 간극을 벤틀리 컨티넨탈 플라잉스퍼와 롤스로이스 고스트가 메운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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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롤렉스는 오트 오를로지(하이엔드 워치메이킹, haute horlogerie)에 견줄 만한 가격대의 제품을 주력으로 선보이며, 하이엔드 시장 공략의 신호를 보내왔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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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번 랜드-드웰러의 출시로 롤렉스는 자사의 스카이-드웰러부터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까지 아우르는 넓은 가격대를 선점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며, 더 이상 ‘툴 워치’ 메이커가 아닌 하이엔드 워치메이커로서의 포지셔닝을 더욱 확고히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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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불경기가 지속되는 지금, 롤렉스는 70년대 쿼츠 파동과 오일 쇼크의 위기를 극복했던 것처럼, 막강한 브랜드 파워를 바탕으로 가파른 가격 인상과 고가 제품의 대거 출시를 통해 이번 위기 또한 돌파해 나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David Hwang
시계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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