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느 학교를 ‘명문’이라고 부를 경우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까요? 우수한 인재들이 배출되었고, 그러한 인재를 육성시킬 수 있는 노하우가 있는 교육기관이기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에 졸업한 ‘빈티지’ 동문들이 그 학교의 브랜드 가치를 입증하는 결과물이라는 뜻이죠.
같은 맥락에서 빈티지 시계로 인정받는 타임피스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특정 브랜드의 가치와 아이덴티티를 형성시키고, 더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세그먼트를 탄생시킬 만큼 영향력이 있던 시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데이트저스트 Ref. 4467 / © Rolex, Monochrome
빈티지 시장에서 가장 풍부한 거래량을 자랑하는 모델 중 하나인 롤렉스 데이트저스트(Datejust)는
1945년, 날짜 기능을 더한 자동 무브먼트를 방수 케이스에 담고, 플루티드 베젤과 주빌리 브레이슬릿으로 완성된 일명 ‘데일리 럭셔리’ 시계로 탄생했습니다. 이후 데이데이트, 스카이드웰러, 씨드웰러 등 롤렉스의 다른 라인뿐 아니라 타 브랜드에도 적지 않은 영감을 안겨준 시계로 평가받습니다.


최초의 칼라트라바 Ref. 96 © Monochrome
파텍 필립의 칼라트라바(Calatrava)는 절제된 고급스러움을 정의한 드레스 워치의 정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32년 출시된 레퍼런스 96은 이후 파텍 필립의 수많은 드레스 워치에 뼈대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바쉐론 콘스탄틴, 예거 르쿨트르, 피아제 등 여러 브랜드가 유사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피드마스터 Ref. 2915 / © Analog:Shift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는 스토리의 가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아이콘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달 착륙은 물론, 아폴로 13호의 작동 오류로 우주 미아가 될 뻔한 우주인들을 무사히 귀환시킨 일화까지 — 이런 역사적 순간들이 스피드마스터를 1957년 출시 이후 68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시계로 만들어주었습니다.


© Wind Vintage
롤렉스의 ‘도미노피자’ 에어킹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도미노피자에서 1주일간 2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달성한 지점장에게 주어졌던 특별한 시계로, 6시 방향의 도미노 로고가 더해진 이 에어킹은 오늘날 빈티지 컬렉터들 사이에서 독특한 상징성과 함께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로열 오크 Ref. 5420 / © Audemars Piguet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는 시계 역사에서 디자인 혁신의 아이콘으로 꼽힙니다.
시계 헤드와 브레이슬릿이 하나로 연결된 듯한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며 '럭셔리 스포츠 워치'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 시계입니다. 그 영향력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며, 로열 오크는 물론 이후 등장한 수많은 럭셔리 스포츠 워치들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 Forbes
까르띠에 크래쉬(Crash)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규칙을 무너뜨린 시계입니다.
1967년, 배우 스튜어트 그레인저가 ‘세상에 하나뿐인 시계’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하며 까르띠에 런던 부티크에서 탄생했죠. 사각형도, 원형도, 타원형도 아닌 의도적으로 찌그러뜨린 케이스는 지금 봐도 파격적입니다. 심지어 시계를 의뢰했던 그레인저조차 단 일주일 만에 “너무 과했다”며 반납했다는 일화는 이 시계의 전설적인 출발점을 더욱 인상 깊게 만들어줍니다.


© SWISSWATCHES MEDIA GMBH
브라이틀링 네비타이머는 최초의 파일럿 워치도, 최초의 크로노그래프도, 최초의 브라이틀링 손목시계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네비타이머는 브라이틀링의 상징이자 정체성을 가장 명확히 드러내는 모델로 자리 잡았습니다. 민항기 파일럿들에게 필요한 수많은 계기 기능을 시계 하나에 담아낸 과감한 발상은, 다소 복잡할지언정 브라이틀링만의 독보적인 매력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 Watchonista
까르띠에 탱크(Tank)는 까르띠에를 대표하는 타임피스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17년 등장한 탱크는 산토스(1904년)보다 늦게 태어났지만, 훨씬 다양한 버전으로 확장되며 수십 년간 셀럽들의 손목을 장식해 왔습니다. 크래쉬처럼 파격적이지도, 가장 비싼 모델도 아니지만, 시대를 초월한 우아함과 미학적 균형감으로 까르띠에의 상징적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007 골드핑거
© Eon Productions, United Artists, 1964
물론 이외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가치’를 증명해 온 시계들이 있습니다.
배우 숀 코너리가 007 제임스 본드로 활약하던 당시, 턱시도 차림으로 착용했던 롤렉스 서브마리너.
트루비옹을 발명한 브레게의 명성을 다시 부활시킨 다니엘 로스의 브레게 트루비옹 Ref. 3350.
그리고 시계를 주머니에서 손목 위로 옮겨 놓으며 현대 시계의 시작을 연 까르띠에 산토스까지.

브레게 투르비옹 Ref. 3350 / © A Collected Man
확실한 것은, 이러한 기준이 충족될수록 그리고 그 의미가 깊어질수록 시계의 가치는 시간과 유행의 흐름을 넘어 ‘타임리스’한 존재, 즉 가치 있는 빈티지 시계가 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한다 해도, 1940년에 졸업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즐거운 탐색 끝에 만난 빈티지 시계를 통해, 그 시계를 만든 워치메이커의 철학과 시대의 가치를 손목 위에 간직하고, 또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빈티지를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