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mm 이하의 ‘미드사이즈’ 시계를 선호하셨던 분들께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럭셔리 시계 시장에는 오랜만에 사이즈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 많은 분들이 이미 체감하고 계실 텐데요. 오늘날 많은 시계들이 40mm 이상을 표준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진정한 ‘나만의 핏’을 찾는 분들에게는 오히려 더 작은 사이즈가 어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착용자를 압도하는 시계보다는, 착용자의 스타일과 전체적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시계 — 그런 시계들이 다시 주목받는 시대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블랑팡은 브랜드의 아이콘인 다이버 워치 피프티 패덤즈(Fifty Fathoms)를 역사상 최초로 38mm 사이즈로 선보이며, 기존의 대형 다이버 워치 이미지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했습니다. 까르띠에(Cartier)의 스포츠 워치 라인업인 산토스(Santos) 역시 마침내 스몰 사이즈 케이스를 출시하며, 손목이 얇은 이들을 배려한 선택지를 더했습니다. 튜더(Tudor)는 큰 사랑을 받았던 블랙 베이 54를 조용히 2년 만에 다시 카탈로그에 편입시키며 이 트렌드에 자연스럽게 합류했습니다. 사이즈 다운을 통해 선택지는 더욱 세분화되고 있습니다. ‘핏한 시계’를 기다려온 모든 분들께, 지금이 바로 그 기다림에 보답받을 시간일수도 있습니다.
© Blancpain
오버사이즈 다이버 워치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피프티 패덤즈. 블랑팡이 최초로 38mm의 피프티 패덤즈를 출시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공개된 38mm 모델은 블랙과 블루가 아닌, 로즈 골드와 티타늄 케이스에 자개 다이얼을 더한 독특한 구성으로 출시되어, 클래식한 데일리 다이버를 기대했던 팬들에게는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는 본격적인 라인업 확장을 앞둔 전초전, 즉 ‘맛보기’였습니다.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블랙과 블루 다이얼의 38mm 라인업이 출시되며, 기다림은 기대감으로 바뀌었습니다.
2023년 42mm의 5010 레퍼런스 출시 이후 불과 2년 만에 새로운 사이즈가 등장했습니다. 깜짝 변신은 아니지만, 또 한 번의 다운사이징은 많은 이들에게 의외였을지도 모릅니다. 바라쿠다, 밀-스펙, 노 래드, Act 시리즈와 같은 40mm 한정판 모델들이 꾸준히 선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다수의 소비자들은 ‘정규 라인업’으로서의 40mm를 기대해왔던 것 같은데요. 40mm는 어디까지나 리미티드 전용 사이즈였던 셈입니다.
© Atom Moore Photography
이번 38mm 버전은 스테인리스 스틸, 그레이드 23 티타늄, 18K 레드 골드 등 세 가지 케이스 소재로 구성되며, 다양한 스트랩 옵션이 더해져 총 16가지 조합으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블랙과 블루 베젤 모델에는 세일 캔버스, NATO, ‘트로픽’ 러버 스트랩, 메탈 브레이슬릿까지 총 네 가지 스트랩 구성이 제공됩니다. 피프티 패덤즈 컬렉션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친숙한 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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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전반적으로 피프티 패덤즈 고유의 DNA를 충실히 따릅니다. 스틸 모델은 풀 폴리시드 케이스로 럭셔리 다이버 워치의 매력을 강조했고, 티타늄 모델은 브러시드 마감으로 툴워치의 견고한 감성을 강조합니다. 러그 투 러그 길이는 43.8mm, 러그 폭은 19mm로, 일반적인 38mm 시계보다 작고 단정하게 착용되는 비율을 보여줍니다. 참고로 롤렉스 익스플로러 Ref. 124270의 러그 투 러그는 약 43.2mm입니다. 이 수치는 손목이 가는 남성은 물론 여성 사용자들에게도 안정감 있는 핏을 제공하며, 진정한 유니섹스 다이버 워치로서의 매력을 더해줍니다.
© Blancpain
다이얼은 선레이 마감이 적용된 블랙 혹은 블루 컬러로 구성되며, 핸즈와 아플리케 인덱스에는 화이트 골드가 사용됩니다. 레드 골드 모델에는 동일한 레드 골드 소재로 미적 통일감을 이룹니다. 42mm 모델에서 채택한 단차 없는 깔끔한 레이아웃은 축소된 다이얼에서도 시각적 밸런스를 해치지 않는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베젤은 단방향 회전 구조로, 시그니처인 사파이어 인서트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모든 인덱스, 핸즈, 베젤 마커에는 슈퍼루미노바 야광 처리도 빠짐없이 적용되었습니다.
© Time+Tide
무브먼트는 빌레레 컬렉션과 38mm 바티스카프 모델에도 사용되는 칼리버 1150이 탑재되었습니다. 이 무브먼트를 통해 케이스 두께는 단 12mm로 얇게 설계되었으며, 이는 기존 42mm 모델보다 2mm 얇은 수치입니다. 100시간 파워리저브, 실리콘 밸런스 스프링에 의한 향자성 성능, 그리고 투명 사파이어 케이스백을 통해 드러나는 레트로풍 NAC 코팅의 18K 골드 로터는 텍스처 마감 처리되었습니다.
© Blancpain
먼저 출시되었던 두 가지 모델은 더 톡톡 튀는 개성이 있습니다. 로즈 골드 + 블랙 마더오브펄 다이얼 모델은 중앙의 연한 스모키 그레이에서 바깥쪽의 짙은 블랙으로 그라데이션이 이어지는 dégradé 효과를 통해 입체감을 표현합니다. 모든 다이얼이 서로 다른 텍스처를 갖기 때문에, 각 시계마다 미묘하게 다른 표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이에 비해 그레이드 23 티타늄 모델은 핑크 톤이 시계 전면을 감싸며, 핸즈, 인덱스, 베젤 인서트, NATO 스트랩까지 모두 핑크 컬러로 통일되어 유쾌하고 젊은 에너지를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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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rtier
까르띠에도 하나의 ‘최초’를 선보였습니다. 2018년 산토스 드 까르띠에(Santos de Cartier) 컬렉션이 재출시된 이후 처음으로, 스몰 사이즈 모델이 정식 라인업에 합류한 것입니다. 초기 구성은 스테인리스 스틸, 스틸과 옐로우 골드의 투톤, 그리고 옐로우 골드 버전까지 총 세 가지로 출시되었습니다.
이번 스몰 사이즈는 기존 미디엄과 라지 사이즈에서 보여주던 디자인 언어를 그대로 계승합니다. 단종된 산토스 갈베(Santos Galbée)와 비슷한 사이즈지만,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현대적 산토스 드 까르띠입니다. 케이스는 정제된 곡선을 그리며, 폴리시드 베젤이 브레이슬릿의 엔드링크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실루엣이 인상적입니다.
© Cartier
케이스 사이즈는 34.5mm(러그-투-러그) × 27mm. 이는 예전 갈베 시리즈의 아담한 사이즈를 그리워하던 남성 컬렉터뿐 아니라, 까르띠에의 스포츠 워치를 부담 없이 착용하고자 했던 여성 소비자에게도 반가운 소식입니다. 참고로 미디엄 사이즈와는 러그-투-러그 기준으로 7.4mm 차이가 나며, 손목이 얇은 분들이 기존 모델에서 느끼던 부담을 상당 부분 해소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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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얼에는 선레이 마감이 적용된 실버 톤이 사용되어, 기존 산토스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오팔린 다이얼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작아진 케이스 속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기 위한 선택으로 보이며, 스몰 사이즈의 정체성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어줍니다.
스몰과 라지 사이즈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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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기엔 단순히 크기를 줄인 리사이징처럼 보일 수 있지만, 기술적인 구성은 미디엄/라지 모델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오토매틱이 아닌 쿼츠 무브먼트를 탑재했다는 점입니다. 데일리웨어로의 실용성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슬림한 케이스 비율을 유지하기 위한 결정으로 보이며, 실제로 두께는 7.08mm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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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랩 교체 시스템 또한 변화가 있습니다. 퀵스위치(QuickSwitch) 기능은 발롱 블루 모델에서 볼 수 있었던 방식과 유사하게, 버튼을 누르는 방식이 아닌 내부 레버를 밀어 탈부착하는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브레이슬릿과 클라스프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팬더 워치에 적용된 것과 유사한 히든 클라스프 구조로, 푸시 버튼 없이 손으로 직접 당겨 여는 방식입니다. 이는 작은 사이즈와의 조화를 고려해, 버튼을 과감히 생략한 디자인으로 보입니다. 획기적인 방법으로 링크를 뺄 수 있는 스마트링크(SmartLink)는 스몰 사이즈에서 제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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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수 성능은 30m로 생활 방수 수준이지만, 산토스 스몰을 선택하는 고객이 이 시계를 착용하고 격렬한 활동을 할 일은 많지 않겠죠. 전반적으로 유려하게 다듬어진 설계이며, 기존 산토스 미디엄 모델의 사이징이 고민이었던 분들에게 훌륭한 대안이 되어줄 수 있는 제품입니다. 무엇보다도 반가운 점은, 팬더 워치와 탱크의 익숙함에 지친 이들을 위해 까르띠에 스포츠 워치 옵셔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몇 년간 튜더는 히트작을 연달아 터뜨리고 있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컬렉터들의 취향도 저격하고 있으며, 리셀 프리미엄까지 붙는 모델들도 생겼습니다. 브랜드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기존의 ‘문법’을 깨는 실험적인 큐레이션인 Daring Watches가 바로 이 프리미엄을 누리는 시리즈입니다. 41mm와 42mm 모델로 차근히 쌓아온 Daring Watches 큐레이션에 더 작은 사이즈 시계가 합류하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그 대상이 바로 37mm였다는 점은 의외의 선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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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ing Watches의 다음 주인공이 바로 블랙 베이 54 “라군 블루”(Black Bay 54 ”‘Lagoon Blue”)입니다. 활기찬 마이애미 테마의 컬러를 품은 이 모델은, 모험적 스포티함과 릴랙스된 럭셔리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색채를 지녔습니다. 블랙 베이 54 자체는 튜더의 첫 서브마리너 Ref. 7922를 오마주한 모델이지만, “라군 블루”는 디자인 전반에서 90~2000년대의 Prince Date Submariner와 Hydronaut 시절을 연상시키는 요소들이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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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모델의 중심에는 샌드 텍스처 마감이 적용된 “라군 블루” 다이얼이 있습니다. 단순히 ‘티파니 블루’ 트렌드에 올라탄 컬러 변주가 아니라, 다이얼-케이스-브레이슬릿, 각 요소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조화로운 톤이 완성된 시계입니다. “라군 블루”의 멋을 살려주는 핵심 포인트는 미러-폴리싱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다이얼 핸즈와 인덱스는 모두 미러 폴리시드 처리로 통일되어 강한 반사광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납니다. 베젤도 통일된 테마를 따릅니다. 오랜 시간 사용되지 않았던 미러 폴리시드 회전 베젤이 부활했으며, 여기에 샌드 텍스처로 새겨진 시간 및 분 마커가 더해져, 빛을 반사하는 표면 위에서도 뛰어난 가독성을 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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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 모든 요소를 받쳐주는 브레이슬릿은 기존 블랙 베이 54와 달리 5열 링크 구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롤렉스의 쥬빌리 브레이슬릿을 연상시키는 이 브레이슬릿은 중앙 링크에 폴리시드 처리를 더해, 전체적인 광택감이 시각적 톤을 통일시키는 매우 중요한 미학적 포인트가 됩니다.
무브먼트는 기존 블랙 베이 54와 동일한 Calibre MT5400이 탑재됩니다. 28,800vph의 진동수, 70시간의 파워리저브, 실리콘 밸런스 스프링을 갖추고 있으며 COSC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았습니다. 최신 블랙 베이 58 라인업에 적용된 METAS 인증 무브먼트는 아니지만, 튜더의 내부 기준인 일 오차 -2/+4초 이내의 높은 정밀도를 충족합니다. 이번 모델은 블랙 베이 54의 업그레이드라기보다는, 디자인과 분위기에 초점을 맞춘 컬러 바리에이션으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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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비자가 밀리터리 기반의 빈티지 디자인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Daring Watches 컬렉션 역시 그런 정형성을 벗어나 현대적인 감성을 추구하려는 흐름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튜더는 여전히 아카이브를 참고해 과거의 디자인을 재해석하고 있지만, 동시에 무게를 덜어낸 블랙 베이도 꾸준히 출시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Young
Writer
내 꿈은 시계왕.